산책하는 침략자
Before We Vanish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글 미화밖
전조라면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장마를 미처 다 떨쳐내지 못하여 잿빛 물감을 탄 것처럼 탁한 하늘과 해가 갈수록 뜨거워져 가는 일본의 여름, 어깨를 옹송그리고 고개를 푹 파묻은 채 빌딩 숲을 헤치고 어딘가로 하염없이 돌아가는 사람들. 틀에 박힌 멸망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광경이었으나 적어도 카부야의 세계는 지금 이곳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생각하고 가늠한다. 지금 소라의 손목을 붙잡고 반대편으로 뛰어간다면, 그는 자신을 따라와 줄까?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며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만을 기다릴까? 시험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감각한 네 개의 눈동자가 신호등 한 쌍이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놓인 좁은 건널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요하게 카부야를 쫓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부야 곁에 선 소라를. 그리고 소라, 소라는 제 소매를 붙들고 미약한 힘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한 카부야의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건널목 너머의 두 이형異形과 꼭 닮아 부자연스럽게 경직된 자세와 생기 없는 표정으로 꼿꼿이 서서 그들을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카부야는 힘주어 깨문 아랫입술로부터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는 것을 몇 박자 뒤늦게 알아차렸다. 지금의 소라는 카부야가 알던 그 어떤 때의 소라와도 달랐다.
공포와 불안이 발작적으로 전신을 움켜쥐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자격으로, 대체 무엇을? 자문하면서도 카부야는 입을 열었다. 소라의 소매를 놓고 손목을 고쳐 잡는 손끝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라.”
“…….”
“소라, 내 말 듣고 있어?”
무언을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익숙해졌던 매미 소리가 귀청을 찢을 기세로 돌연 소리를 높였다. 다음 순간 붉게 빛을 뿌리던 신호등 불빛이 색을 달리했다. 양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느릿느릿 움직여 길을 건너기 시작했지만, 소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부야의 말에 대답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대로 돌처럼 굳어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름 끼칠 정도의 이질감이 카부야의 몸을 휩쓸었다. 전에 없던 위화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정작 소라가 얼토당토않은 선언을 내뱉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는데.
“소라!”
카부야가 보채듯 소라의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자리에 붙박여 고정된 듯하던 암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제 쪽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카부야는 놓치지 않았다. 돌아가자, 응? 카부야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짓자 소라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곤란해하고 있다. 곤란해하다니. 의사결정에 1분 이상 걸렸던 적이 없는 그 소라가 갈등이라니! 카부야는 짧고도 강렬한 충격에서 최대한 빠르게 헤어 나오려 몸부림을 쳤다. 정말이지 더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누군지는 알아요. 하지만 사람은 아니에요. 제 동료니까요. 소라는 짧게 답하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조금 전까지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거의 다 길을 건넌 참이었다. 소라의 얼굴 뒤로 파란불이 멈춰선 이들을 재촉하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카부야는 빠르게 눈을 굴려 소라와 무척 비슷한 분위기를 두른, 그리고 지금의 카부야나 소라와 마찬가지로 영 이쪽으로 건너올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한 두 사람을 다시금 확인했다. 소라와 마찬가지로 잘 쳐 봐야 고등학생 같은 외모의 소년 소녀. 소녀 쪽은 갈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풀어 헤친 상태였다. 일견 정리되지 않은 인상을 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복장이었는데, 매니악한 카페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메이드복 탓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두 번씩은 어김없이 소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소년의 복장은 소녀에 비하자면 평범한 축에 들었다. 소년은 평범한 교복 – 넥타이를 매는 대신 목에 감듯이 두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지만 – 을 입고 있었다. 소매를 팔뚝까지 접어 올리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모습에서는 외관상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도 일종의 무료와 권태마저 느껴졌다.
그들은 동료라고 소라는 말했다. 그렇다면 물론 사람이 아니겠지. 소라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또한 소라처럼, 그들 역시 평범한 걸음으로 거리를 산책하듯 찾아온 무자비한 침략자일 것이라고. 카부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자신이 신체 나이론 저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릴 소녀의 팔을 내팽개치고 공포로부터, 미지가 드리우는 그림자로부터 막무가내로 도망치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카부야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숨을 골랐다. 알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이 어떠한 중대한 갈림길에 다다라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자기만의 운명이 달린 것도 아닌 결정적인 교차로에.
우습게도 그런 순간 생각나는 것은 곧 침략당할 행성을 딛고 선 절망이나 샘플 몇몇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인류에 대한 연민 따위가 아니었다. 카부야는 불현듯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교과서에 나올 만큼 틀에 박힌 좋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저 그런 구질구질한 삶들을. 어느 순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선배를 떠올렸고 그 선배를 연상시키는 소라의 면면들을 곱씹었다. 이것이 끝을 감지한 생물 특유의 발악인지, 아니면 이유 없이 호감을 사는 면모마저 이 이종異種들의 축복받은 특성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라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그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카부야는 소라가 가야 한다고 말하기 전 무작정 입을 열어 애걸했다.
“가지 마, 소라.”
“카부야 씨?”
“약속했잖아. 선배처럼 떠나지는 않겠다고.”
꼴사납게 매달리고 있다는 자각과 일말의 수치보다도 소라가 중요했다. 이상의 선배가 되어 드릴게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렇게 말한 뒤로, 정말 자신이 돌아올 때마다 현관으로 걸어 나와 무표정한 낯으로 다정히 팔을 벌리던 수수께끼의 생명체가. 포옹의 방법조차 몰라 뻣뻣하게 몸 위에 팔을 올려둘 뿐이었으나 카부야에게는 그 우스운 접촉이 우스울 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인류는 타인의 체온 없이는 헤쳐 나가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소라는 길 건너편을 한 번, 제 팔을 쥐고 잘게 떨고 있는 카부야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옅은 곤혹 끝에 소녀는 다른 손을 들어 제 손목을 잡은 카부야의 손을 떼어냈다.
“네.”
그리고 꼭 맞잡았다. 빈틈없이 손바닥이 맞물린다. 카부야는 고개를 들어 흔들림 없는 암갈색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랬었죠.”
소라는 지금까지의 부동이 거짓말인 것처럼 곧장 뒤로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실로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카부야는 엉겁결에 몇 발자국 끌려가면서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건널목 저편을 확인했다. 소라의 동료라던 소년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소녀 쪽이 작게 손을 흔들었나?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로 카부야는 달렸다. 소라는 꼭 카부야도 모르는 목적지를 아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다리를 움직였고, 카부야가 숨을 헐떡이며 더는 못 뛴다고 멈춰 서서 버티기 시작한 후에야 카부야의 손을 놓아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카부야가 물었고 소라는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디로 가든 똑같을 거예요.”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으므로 카부야가 그 말의 무게를 가늠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소라는 카부야의 멍한 낯을 훑어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부연했다. 아까 회의를 마쳤거든요. 결론을 냈어요.
“시작될 거예요. 그리고 순식간에 끝나겠죠.”
주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소라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구태여 되묻지 않았고, 카부야는 밀려드는 절망과 맞서 싸우려 연거푸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시작된다. 침략이. 개념을, 언어를 빼앗아 먹는 수수께끼의 외적에 의한 일방적인 도륙이.
우리가 문제투성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오래전 각자의 이유로 깊이 상처받아 곪아 터진 환부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이미 한껏 지친 낯을 하고 카부야를 찾았다. 카부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깊이 슬퍼하고 또 공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상처입힌 일을 그저 경청하고 위로하여 생계를 꾸렸고 명성을 얻었다. 손님이 드문 편이 나은 직업일진대 매일같이 성황이라는 점이 다른 그 무엇보다 슬펐다. 이렇게 서로를 상처입힐 뿐인 우리가, 불통의 극단에 놓인 우리가, 더 나아지는 날이 올까. 해묵은 고민이 더는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났을 무렵 그 아이가 카부야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 한가운데 서서 기행을 일삼는 고등학생의 정신 이상을 의심한 오지랖 넓은 경관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어떻게든 데리고 와 두드린 것이었지만, 그건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 소라는 상담 클리닉 안내 팸플릿을 거꾸로 들고 열심히 읽다가 – 카부야가 뒤집어 주자 아, 하고 어려운 문제의 명쾌한 해답을 발견한 수학자 같은 탄성을 내질렀더랬다 – 생뚱맞은 소리를 뱉었다.
제 가이드가 되어주시겠어요?
가이드?
네. 이 행성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조금 전에도 실수한 것 같고, 아까 보셨다시피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거든요.
꼭 인간의 몸에 들어온 외계인 같은 말을 하네. 카부야가 어색하게 농담을 던지며 웃었을 때, 소라는 카부야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선보였다. 실소를 내뱉거나 썰렁하다고 핀잔을 주는 대신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린 것이다. 그 후 소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티가 나나요? 그건 미처 몰랐네요. 역시 가이드가 필요하겠어요.
지구에는 딱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로부터 2주 가까이 지나 카부야가 너희의 침략이란 게 끝나면 지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꼭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묻는 것 같던 평온한 목소리로 그는 답했던가. 그저 인류가 멸망할 뿐이죠. 예외 없이, 불가역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천편일률적인 단어들을 고저 없는 투로 나열하고서 소라는 표정 없는 얼굴로도 퍽 뿌듯한 티가 나는 낯을 해 보였었다. 음, 꽤 많이 배운 것 같네요. 카부야 씨 덕분이에요. 어색하게 웃는 것 말곤 적절한 반응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카부야는 어색하게 웃고선 난 별거 안 한 것 같은데, 하고 솔직한 감상을 말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엔 그들의 방식을 몰랐으니까.
배운 게 아니라 빼앗아 간 것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소라에게 지나치게 구원받아버린 뒤였다.
“이렇게 빠를 거라곤 얘기 안 했잖아.”
“죄송해요.”
“이상의 선배가 되어 주겠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었구나.”
“죄송해요.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할 생각 마.”
소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카부야는 무언가를 눌러 참아내며 액셀을 밟은 발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뻥 뚫린 도로를 따라 카부야의 오래된 경차가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몰락을 앞둔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당장 내일 아침은 밝을 수 있을까. 어울리지 않게도 로맨틱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자조가 섞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카부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네가 좋았어.”
“…….”
“네가 정말로 외계인이고, 인류가 지닌 얼마 안 되는 좋은 걸 모조리 빼앗으러 왔다고 해도, 나는 네가 좋았다고.”
애초에 저도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면 오히려 더 속이 상한다. 카부야는 불합리한 원망을 담아 무언가 더 쏘아붙이려다가, 문득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에 저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거센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체가 멈추어 섰다. 예고 없는 제동에 앞으로 몸이 쏠려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박은 소라가 제 머리를 어루만지며 어리둥절해서 카부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부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소라.”
“네, 네.”
“사랑은 뺏었어?”
“네?”
“아직이구나.”
잠깐 멍하다가, 제 의중을 파악하자마자 미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소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부야는 기운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안경을 벗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뇨. 싫어요. 소라가 더듬더듬 중얼거렸지만 카부야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집중하자. 이미지를 떠올리는 거야. 가장 명쾌하고 간결하면서도 그 개념의 핵심을 담은 이미지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끝이 다가오면 마음을 메우는 건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면면이라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생물의 본질이고, 이 별의 본성이고, 삶의 근간에 무엇이 있는지 낱낱이 고하는 방증이라고 말이다.
카부야는 선배를, 그리고 그 선배를 연상시키는 소라의 면면들을 곱씹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소라의 손을 잡았다.
“카부야 씨, 저…….”
“부탁이야, 소라. 네가 받아 가야 해.”
짙게 선팅한 창문 너머로 붉게, 붉게 땅거미가 내렸다. 세상이 종막을 고하는 지금, 이것을 아무도 가져가지 않고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흔들리던 소라의 암갈색 눈이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가, 이내 고요히 자리를 잡았다. 소라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카부야의 이마 근처로. 카부야는 눈을 감고 자신의 세상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불가역적으로 무너져내리기를 기다렸다. 빼앗긴 독소가 이형의 심장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순간 자신은 이미 그곳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조라면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