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Fahrenheit 451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글 아샤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도.
“출동이다!”
방화서를 가득 채운 출동 경보. 새까만 제복의 대원들이 일제히 트럭에 올라탔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동요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고요함이 깔려있었다.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방화서 벽면의 슬로건. 한밤중의 어둠에 사이렌 소리가 부딪히고 있었다.
킨조는 무덤덤하게 헬멧을 쓰며 트럭에 올라탔다. 뒷자리에는 같은 헬멧을 쓴 백발의 남자가 점화기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었다. 헬멧에 커다랗게 새겨진 숫자 451. 그가 점화기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한밤중이 아닌 출동이 없군.”
“늘 그렇지. 덕분에 구경꾼들은 날마다 늘어나고 말이야.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드라마틱 하다나.”
“드라마틱인가...”
그가 고개를 돌리고 작게 읊조렸다.
고발당해 늘어놓은 책들을 무자비한 화염 속에서 타오르게 하는 짓을 시작한 지도 어언 3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일이다. 킨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밤공기를 뚫고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방화수는 책을 태운다. 책이 있는 집이라면 그 집마저도 모조리. 세상은 이제 즉각적인 정보에 취한 채 단순한 쾌락만을 바란다. 자연히 문화란 저렴하고 텅 빈 채 비대해진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그런 문화의 흐름은 두뇌가 돌아가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돌아간다. 따라서 생각의 질을 향상시키고 세상을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을 부여하는 독서는 금지된 것이다. 책은 규탄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었고, 출판사도 제지업사도 손에 펜을 든 작자들도 사라진 지 오래. ‘지성인’이 욕설이 된 세상에서 독서는 방화로 이어질 뿐이다. 마땅한 법이지. 방화수들에게 있어선 수도 없이 교육받은 규율이다.
킨조가 탄 트럭이 이윽고 현장에 멈춰 섰다. 한 노인이 겁에 질린 채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거실의 창문을 통해 보였다. 신고자의 쪽지를 보아하니 옆집 주인이 고발한 모양이다. 이웃도 믿을 게 못 되는군. 킨조는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우에하라!”
그의 부름을 들은 백발의 남자가 점화기를 들고 뒤따라왔다.
“다락방의 곳곳을 쑤셔서 찾아. 나는 주방을 찾아볼게.”
“알겠다.”
그들은 집안 곳곳에 숨겨진 책을 찾아내 창밖으로 던졌다. 토스터 안의 헤밍웨이 두 권. 찬장의 설탕과 지드 한 권. 소파 쿠션 속의 카프카 한 권. 그리고 다락방의 책꽂이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 던져놓은 책들은 벌써 넝마가 되어 근엄하게 꾸며진 가죽 양장도 하찮게 보이는 듯했다. 우에하라가 등유 통을 들어 등유를 뿌렸다. 등유에 절여진 책들이 눅눅하게 퍼져 초라함을 더했다. 이제 점화기의 안전핀을 제거하고, 책 한 권마다 정성스레 불꽃을 선사하기. 킨조는 아주 일상적인 움직임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점화기로부터 뿜어져 나온 빨갛고 노란 불길이 책을 집어삼킨다. 한여름의 태양처럼, 시야 가득히 채워진 붉은 일렁임이다. 시대를 압도한 거장들의 활자가 오그라들며 타오른다. 단말마의 고통이 절망의 순간에 마지막 토로를 하듯 비참한 불길을 자아내고 있다. 질리도록 바라본 장면. 그 장면에서 어떤 희열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저, 킨조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뿐.
“도주했습니다!”
대원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
방화 작업을 끝낸 킨조와 우에하라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체포되었을 터인 노인은 로봇 사냥개의 공격마저 뚫은 모양이었다. 후문의 산길로 도주한 건가. 킨조는 당했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고 방화서에 무전을 보냈다. 이제 온 집안의 벽면 텔레비전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긴장감 넘치는(듯이 꾸며낸) 방송이 전달되고 로봇 사냥개가 날카로운 제압용 독침을 뽐내며 사방을 뛰어다닐 테지. 그러다 잡히면 사형. 혹은 자살. 뻔했다.
“해산이다.”
다들 지친 모양이었다.
불길이 피워낸 열기는 사그라들고 한여름의 묵직한 밤공기가 거리를 채웠다. 커다란 달이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밝혔다.
“도주 경로는 아마 북쪽 강의 상류일 거다. 퇴직한 교수나 목사, 작가들이 숨어 살며 작당모의를 한다는 모양이던데.”
우에하라가 헬멧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서장님께 올려볼게.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아는 거야? 간부들도 모르는 정보일 텐데.”
“주워들은 말이다. 지하철을 떠도는 행상인들이 그러더군.”
우에하라는 헬멧에 새겨진 451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달 아래에서 은빛을 자아냈다. 그가 자진해서 방화서에 왔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부터 의아했다. 차라리 행정과에 죽치고 앉아있는 편이 어울리는데. 매번 같은 형식의 고된 작업에도 지친 기색 없이 묵묵하게 일을 수행해내는 그가 킨조는 여전히 신기했다.
우에하라는 멀리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책을 읽어본 적이 있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방화수에게 책을 읽어본 적이 있냐니. “있다”라고 해도 “없다”라고 해도 명확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서에서 교육용으로 보여준 책들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킨조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우에하라가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은, 법이라는 게 뻔히 존재함을 알면서도 읽고 소유하고 전달하고 그러다 목숨까지 바치게 되는. 그러한 책의 본질이 무엇일지 읽으려고 한 적이 있냐는 거다.”
킨조는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방화되는 집만 1년에 100채가 넘어. 의심을 받아 감시가 붙은 인간들도 60명은 될 거고. 작년에는 방화 도중 자살을 한 인간들만 10명이었다는데, 다 업보지. 안 그래? 죄가 될 짓을 왜 하겠어.”
“그래, 10명이다. 자살만 10명이야. 바스러져가는 집과 책을 바라보며, 자신조차 무의미한 흐름으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으려고 한 자들이 10명이나 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겠나? 저번엔 방화수가 자살을 한 일이 있었지. 한밤중에 시민들 전원의 화학 조성이 담긴 보관실을 털어 자신의 화학 조성을 로봇 사냥개에게 입력시키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공격하게 한 사건. 기록에 따르면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감을 느낀 후 자살’이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을 삶의 끝에 이르게 하는 무언가가, 책 속에 있지 않겠냐는 거다.”
우에하라는 손에 든 헬멧을 꽉 쥐고 있었다. 말을 끝마쳤음에도 시선은 여전히 먼 곳을 향한 채. 여름 내음을 실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방화서의 교육 대로지. 책 속엔 가짜 신과 허황한 철학과 무의미한 허구의 세계가 있을 뿐이야. 이야기는 과거가 남긴 언어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지. 책에 심취해 자신이 대단한 현자라도 된 듯이 행동하는 인간들은 결국 처벌받게 되어있고. 사회에 반한 숱한 범죄자들의 말로잖아. 새삼스레 왜 그런 의문을 갖게 된 거야, 그간 쌓여진 피로감 때문인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단순한 피로감이 낳은 착각이라면 좋겠군.”
한여름의 열기가 잠든 밤공기가 그를 감쌌다. 킨조는 분명 그럴 거라는 확답을 그에게 해줄 수 없었다. 어색하게 가라앉은 둘 사이에 말은 머금은 채 남았다.
“나는 약속이 있어 먼저 떠나겠다.”
“오늘도 그 변호사 한다는 친구와의 약속이야? 요샌 야간 카페가 더 잘 되는 모양이네. 그럼, 내일 서에서 보자.”
“그래.”
우에하라는 그렇게 말하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어색하게 흔든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스산할 정도로 널찍한 플랫폼의 전등이 불안정하게 껌뻑거린다. 잠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도시를 비추고 있는 야간 카페들의 네온사인. 숨 막히는 화려함 속 공허. 얼룩덜룩 어우러진 불빛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매번 다니던 길임에도 킨조는 그 광경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킨조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화서 쪽으로 발을 옮겼다.
우에하라가 떠난 자리에는 이질감만이 남아있다. 밤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이, 이질적인 공기다. 킨조는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흙길을 걸었다. 달은 밤하늘의 눈동자...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하지만 어디였을까. 그는 가끔 자신이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에하라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방화 서장의 아들로서, 손끝에서 태어나는 무자비한 화염으로 금지된 것들을 죽여야 하는 방화수로서, 지금까지 태워온 수도 없이 많은 활자들.
하지만 남는 것은 뭐였지?
그는 목덜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꺼림칙하군. 킨조는 휴대용 점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잡념들도 전부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방화서. 달빛. 찰칵. 불안정한 숨결? 찰칵. 서장. 아버지. 찰칵. 우에하라 킨지. 책. 찰칵. 8월. 공허. 찰칵. 시간. 자신. 찰칵. 등유 냄새피냄새. 불꽃.
불꽃.
잊자.
그의 발이 이윽고 방화서에 다다랐다. 올려다 본 방화서 벽면의 슬로건.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킨조는 시선을 돌려 한밤중임에도 불이 켜진 서장실을 바라보았다. 방화수들도 긴급 출동이 없길 바라며 졸고 있을 시간. 아직도 업무가 남은 걸까. 아니면 업무가 아닐 일들마저 처리하고 있는 걸까. 고개를 떨구자 그의 시야에 전원이 켜진 로봇 사냥개가 들어왔다. 야간 순찰은 오늘이 아닐 텐데. 아니면 우에하라가 말한 대로 또다시 누군가가...
잊으라고.
킨조는 달빛이 앉은 물병을 들이켰다.
*
아직 도시의 모두가 잠들어있는 오전 4시. 한여름의 열기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갑작스레 울린 출동 경보가 킨조의 뇌를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헬멧을 쓰려던 찰나, 서장실에서 직접 울린 출동 경보라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킨조는 당황하며 출력된 쪽지를 쳐다보았다. 고발자의 출처도, 출동 주소도 찍혀있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없었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젖혀보니 부하 대원들은 벌써 트럭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킨조는 서둘러 트럭으로 달려갔다.
“출동 주소가 어디지?”
“가보시면 압니다.”
뭐지 이 자식은? 그의 휘하에서 일하게 된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부하가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상황들에 킨조는 짜증보다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쩐지 부족한 숫자의 대원들은 전부 출동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원이 꺼진 기계 덩어리처럼 조용히, 자동 운전하는 트럭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거리. 강변에 피어나는 열기 한 줄기. 킨조는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며 밤에서 깨어나는 들꽃을 보려고 했지만 트럭의 빠르기에 이내 포기했다.
들꽃?
킨조는 머릿속 깊숙한 곳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요새 피로가 많이 쌓였나 보다. 분명 그런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버지에게 그 어떤 언질을 받지도 못한 채 발생한 이변에 하찮은 들꽃이나 찾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그동안 수없이 밟아온 땅인데, 들꽃을 단 한 번이라도 마주한 적이 없다는 게.
킨조가 여전히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자, 트럭은 금세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발을 뗄 수 없었다.
“여기는...”
우에하라 킨지의 거처였다.
*
킨조는 트럭에서 천천히 내렸다.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텅 빈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다. 하지만 혼란이 뒤섞일 뿐이었다. 되짚어보니 그가 없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지? 그가 없었지 않나. 항상 그의 뒷자리에서 묵묵하게 길가를 바라보던 우에하라가.
그래, 길가를 바라보던.
잽싸게 내린 대원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우에하라를 체포한 모양이다. 자택 앞의 마당에는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깬 시민들이 쇼를 보기 위해 모여있었다. 여전히 몽롱한 낯짝을 한 관객들이다. 타오르는 종잇장이 내지르는 아찔한 비명과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불꽃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도 발을 끌고 왔겠지. 킨조는 숨을 가다듬고 작업을 할 태세를 갖추었다. 일상적으로 진행하면 되는 일이다. 일상적으로. 자신의 손이 의무와 정의 따위를 방패 삼아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의문조차 갖지 않은 채. 아주 일상적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간 대원들이 책들을 찾아내 창밖으로 던지고 있다. 킨조의 명령 없이, 모든 일들을 미리 그려놨다는 듯이. 그는 떨어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성경책? 이제 세상에 남은 종교 서적은 단 한 권도 없다고 기록되었을 텐데. 그는 고개를 들어 체포된 우에하라를 보았다. 그는 포박당한 채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대원들의 움직임을 훑고 있었다. 킨조는 손에 성경책을 쥔 채 입을 열었다.
“녀석의 포박을 풀어라.”
“아, 안됩니다.”
“풀라고.”
킨조가 쏘아붙이자 부하 대원이 마지못해 로프를 풀고 발을 옮겼다. 그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아버지.
어째서일까. 쥐새끼가 방화수 행세를 하며 바로 옆에서 죽치고 있던 것을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냐는 타박? 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했다가는 어떤 꼴이 나는지 본보기로서? 동료가 범죄자가 되었을 때 그가 마음을 약하게 먹게 될까 봐?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어린 나이에 방화수로서 3년을 보내왔다.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실속 있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그게 설령 동료가 휘말릴지라도.
분명 그랬을 터이다.
우에하라는 느슨해진 로프를 내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이곳의 모두를 압도했다. 존재의 무게로 이 어처구니없는 쇼의 막을 내리려는 듯이.
그래, 존재의 무게로.
그의 존재의 이룬 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진행해라. 말초적이고 단순하게. 아주 일상적인 그 작업으로 말이다.”
우에하라가 킨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한 채였다. 집과 책이 타오르는 광경을 견디지 못해 절망에 빠진, 수없이 많이 봐온 범죄자들과 달랐다. 그는 그가 이렇게 될 것을 예기하고 있던 것인가. 킨조의 머릿속에 ‘어째서’라는 의문들이 혼란과 함께 샘솟기 시작했다. 분명 여태까지는... ‘어째서’를 모르고 살아왔지 않았나.
“현장에서 뜸을 들이다니 너답지 않군, 킨조. 어서 진행해라. 수도 없이 해온 작업으로 생을 죽이란 말이다.”
킨조는 손에 책을 쥔 채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아니, 어차피 작업이 끝나면 너는 체포될 거다. 여기서 얘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너 같은 작자가 도대체 방화수는 왜 지원했던 거야? 정부에 반항하기에 우리가 하는 일은 너무나 단조로워. 아주 단조롭게 책을 불태우기만 할 뿐이다. 네가 생을 죽인다고 하는 짓거리를 반복할 뿐이야. 오히려 책 속에는 살인 무기들만이 득실거리지. 수없이 교육받은 내용 아닌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그 어떤 기점부터, 뇌리에 박혀있는 사실 아냐? 그럴싸하게 늘어놓은 활자들은 허구의 세계로 빠지는 길을 제시하지만 거기에 구원은 없다. 결국 죽음으로 내몰릴 뿐이지. 하지만 너는 달리 생각한 모양이군, 안 그래?”
우에하라는 표정 하나 변함없이 킨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 정장이 새벽에 흔들렸다. 하지만 평범한 정장이 아닌, 아주 오래전 기록에서 본 듯한, 킨조의 눈에는 상당히 낯선 의복이었다.
“우선... 방화수로 지원한 계기는 간단하다. 아주 간편하게 책을 훔칠 수 있었지. 방화서의 시스템을 이용해서 써먹을 수 있는 일들 또한 많았고. 그 덕에 네 아버지의 눈에 띈 걸지도 모른다만.”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킨조. 너는 지금 분명하게 망설이고 있어. 네가 해온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 따위를 고수하느라 버려온 수많은 선택지들과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닌가? 너는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책을 지키려 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그런 위인이 아니다. 어떤 숭고한 의도로서 희생할 만큼 의로운 인간상은 되지 못해. 그래, 이건... 내가 불태워온 언어들과 남겨진 언어들에 애도를 표하는 것 정도가 되겠군.”
우에하라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품에서 작은 성냥갑을 꺼내 한 개비를 집어 들었다. 가볍게 그은 성냥에서 작은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피어났다. 킨조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권총을 겨눴다.
“지하 예배당이 있다. 나 같은 인간들을 모아둔 곳이지. 방화서의 추적 시스템을 착실하게 이용해 완벽한 은신 장치를 만들어뒀다. 찾든 말든 그들이 이어나갈 이야기는 계속 어딘가로 점화될 테고.”
그리고 나의 이야기 또한. 킨조는 우에하라가 그렇게 읊조렸다고 생각했다.
킨조는 침착하게 방화서의 매뉴얼을 생각해 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권총을 쥔 손이 망설이고 있었다. 우에하라는 죽으려고 하는 건가. 어째서. 언젠가 그가 했던 말처럼, 그를 삶의 끝에 이르게 하는 무언가가, 책 속에 있는 걸까.
문득 킨조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이질감을 느꼈다. 축축하게 젖은 새벽 공기가 그의 목을 천천히 감싼다. 시간의 흐름이 무겁게 다가온다. 그가 여태껏 보내온 날들은 불에 닿으면 한낱 타르 덩어리로 변할 벽면 텔레비전이나 귀마개 라디오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인가. 이 세상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그를 옭아매어오고... 그의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간다.
“네가 보아야 할 것은 내 죽음 자체가 아니라, 내 죽음의 의미다. 우리가 태워온 것이 한낱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희망과 자전의 압축이듯이.”
아니, 그는 죽어도 싸다. 범법을 저질렀지 않나. 세상의 규율을 어기고는 썩 당당한 태도이지 않나. 그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있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그 어떤 행동조차 하지 않은 채, 죽음에 의연한 태도로, 마치 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킨조는 그가 말을 이어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미래의 신호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고. 비록 나의 언어는 여기서 끝나지만...”
우에하라가 킨조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란다.”
그가 성냥을 떨어뜨렸다.
떨어진 성냥이 등유를 머금은 책에 불을 지폈다. 책 한 권마다 빨갛고 노란 불꽃이 피어난다. 대원들은 곧장 트럭으로 대피했다. 기겁하는 얼굴들로 하찮게 내지른 비명이 귀에 스쳐갔다. 킨조만이 타올라가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솟아오른 불길이 우에하라를 집어삼키는 광경을 바라보며, 킨조는 그가 가졌을 발화점에 대해 생각했다. 불길 뒤편으로 어제를 태운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 일그러진 붉은 태양의 응어리가, 새로운 하루를 끌어올리고 있다. 킨조는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 아침이 찾아온다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다.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모른다.
킨조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여름이 피어나는 흙을 밟았다. 불길이 만들어낸 공백을 걸었다. 불씨가 그의 심장에 앉았다.
*
그는 손에 책을 쥐고 있었다.